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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김치 김치의 유래와 역사에대하여알아보기

우리고유의 김치

1. 김치의 어원

‘김치’의 어원은 ‘딤채’로 ‘딤채 > 딤채 > 김채’로 변화 과정을 거쳐서 ‘김치’로 정착되었다. ‘딤채’는 한자어로 ‘채소를 담그다’는 의미를 지닌 ‘沈菜’에서 비롯되었으나 중국말이 아닌 우리나라 고유어이다. ‘沈菜’는 같은 한자어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에 한글 창제 이전, 채소를 절여 만든 우리 고유의 음식을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향찰식 표 기어일 것으로 추정된다.

‘沈’은 고대에는 [딤], 16세기 이후에는 [팀], 현재는 [침]이라는 음가를 가진다. 그런데 [팀]과 [침]에서 [김]으로 변화하는 것은 국어 음운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沈菜’는 [沈 = 딤]이라는 음가를 가지고 있었던 중세 이전에 만들어진 단어였을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딤채’는 적어도 6~7세기 즈음에 만들어진 단어로 ‘沈菜’의 중세 이전 발음인 [딤채]가 [김치]를 거쳐 [김치]로 고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의 또 다른 우리말 ‘디히’
김치를 뜻하는 또 다른 고유어로 ‘지’가 있다. ‘지’는 김치의 옛 명칭인 ‘디히’에 유래한 것으로, 여러 문헌에서 ‘디히 > 지히 > 지이 > 지(찌)’의 변화 과정이 확인된다. 현대에 와서는 장아찌, 짠지, 오그락지, 골곰짠지, 섞박지, 싱건지 등 대개 어미에 붙여 쓰이지만, 전라도에서는 여전히 ‘지’가 김치를 뜻하는 단독 명사로 사용되고 있어 고유 어형의 존속을 확인할 수 있다. 

김치의 또 다른 한자식 표기어 ‘저(菹)’
한편,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문헌에서 김치를 한자어인 ‘저(菹)’로 표기한 사례가 확인된다. 이는 통치 이념으로서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됨에 따라 유교 경전인 《주례(周禮)》, 《예기(禮記)》, 《의례(儀禮)》 등에 나오는 고대 채소 절임인 ‘저(菹)’를 빌려서 김치를 표기한 것으로, 중국의 채소 절임 음식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정리하면, 우리 고유 채소절임은 우리말로 ‘디히’ 또는 ‘딤채’라고 불렸으며, 이를 기록할 때는 침채(沈菜)라는 한자어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 접어들어 유교적 복고주의 영향으로 저(菹)라는 용어의 사용 빈도가 증가하면서 ‘저(菹)’와 ‘침채(沈菜)’ 두 단어가 김치를 표기하는 한자어로 정착하였다.


2. 원시 형태의 채소 절임

 

김치의 기원은 소금에 채소를 절인 원시 채소 절임에서 시작된다. 원시 형태의 채소 절임은 잉여 작물을 오랜 기간 저장 보존하기 위한 보편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인류가 농경 사회에 진입한 후 신석기~청동기 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채소의 장기 저장을 위한 절임은 추운 겨울이 있는 북위 35~45° 지역에서 형성되는데, 특정 지역에서 기원해 전파되었다기보다 여러 문화권에서 자생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다만, 현재 채소 절임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중국 주나라 때의 문헌들이기 때문에 중국이 채소 발효 음식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중 중국 주나라 때(BC 10세기 경)의 민요를 모아 엮은 《시경(詩經)》에 ‘오이를 깎아 저를 만들어 조상께 바쳤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 생활상을 담고 있는 기록으로 당시 동북아 지역의 원시 채소절임의 재료와 이용 목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중국이 인류 채소 절임 문화의 시초라거나 이를 다른 지역에 전파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하였던 원시 형태 채소 절임이 기술과 노하우의 교류나 축적 과정에서 각자 자연 생태, 사회경제적 여건, 민족적 기호에 영향을 받으며 달라지게 되는데, 중국과 한반도 두 문화권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이 6세기 전반에 편찬되어 현존 최고(最古)의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서 확인된다. 중국 북위(北魏) 때 산동 지역의 가사협이 집필한 《제민요술》에는 채소를 건조하거나 데치는 전처리 과정을 거치거나 술, 식초 등을 담금원으로 사용하는 절임류의 비중이 높다. 반면, 한반도의 김치는 소금과 장을 이용하고 생채소를 그대로 사용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 책이 편찬된 시기는 한반도의 삼국 시대에 해당되므로, 적어도 삼국 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의 채소절임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3. 조선 시대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김치의 원형이 완성된 시기는 조선 시대이다. 세 가지 재료의 유입 단계에 따라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형태와 맛을 지닌 음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첫째, 김치가 다른 문화권의 채소 절임과 결정적인 차별점은 동물성 발효 식품인 젓갈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삼국 시대부터 이미 젓갈 문화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젓갈과 채소를 버무려 먹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 시대이다. 젓갈을 ‘섞었다’는 의미로 섞박지라고 불렀는데 주로 오이, 무, 동아 등의 채소와 버무려 만들었다.

젓갈이 들어간 김치를 만드는 방법은 1600년대 이전 조리서인 《주초 침 저 방(酒醋沉菹方)》에 〈감동저(甘動菹)〉라는 항목으로 처음 등장한다. '감동'이란 보라색을 띠는 작은 새우로, ‘곤쟁이’, ‘자하’ 등의 별칭으로도 불렸다. 감동저는 이 감동으로 만든 젓갈(감동 젓, 곤쟁이젓)을 절인 오이에 버무려 만들었다. 젓갈은 매우 귀한 식재료였기 때문에 이 감동저(곤쟁이젓 섞박지)는 접대 및 선물용으로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이 접할 수 있는 김치는 아니었다. 아주 고급 음식으로 중국 사신 접대나 귀한 선물용으로 활용되었던 기록이 1400~1500년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여러 문집에 남아 있어 젓갈 김치의 역사는 조선 초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신대륙이 원산지인 고추가 조선 후기에 유입된 이후 김치의 원료로 사용되면서 김치의 색과 맛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매혹적인 붉은색으로 식욕을 자극하였고, 고추의 매운맛과 방부 작용은 소금의 사용량을 줄여도 유산균 발효가 잘 일어나도록 도왔다. 18세기 이후부터는 젓갈 유통도 활발해져 김치에 젓갈을 사용하는 제조법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는데, 마침 고추는 젓갈의 비린내를 줄여주는 역할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김치의 이상 발효를 막기 위해 사용되어 오던 분디(제피, 산초라고도 함), 여뀌, 정가(형개), 자소 등의 재료가 점차 고추로 대체되었다. 고추를 넣은 후 김치 맛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어 김치에 고추 사용이 적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외국에서 유입되어 생소했던 고추는 가난한 승려들이나 먹던 값싼 식재료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피폐한 삶을 살던 양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질 수 있었다.  

셋째, 오늘날 김치의 대명사로 여기는 통배추김치 제조법이 완성된다. 배추는 고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땅에서는 재배가 잘 되지 않는 귀한 식재료라 일상적인 반찬으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김치의 재료는 오이, 가지, 무, 동아가 주를 이루었다. 1800년 전후로 조선 땅에서 배추가 재배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한양의 권세가나 왕실에 납품되던 용도에 한정되었고, 전국적으로 재배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800년대 중엽 이후 이파리가 많이 달린 결구 성 배추 재배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젓갈과 갖은 향신 양념을 함께 버무린 섞박지형 양념소를 배춧잎 사이사이에 넣는 형태의 김치가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8~19세기 상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계층이 형성되면서, 김치도 화려해져 각종 해산물과 여러 가지 종류의 젓갈, 고기나 해산물 육수까지 더해진 김치 제조법도 널리 퍼졌다.